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 (문단 편집) ==== 역참 제도 ==== 몽골 제국이 출연한 13세기 초부터 올로스들이 붕괴하는 14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올로스 내부와 그들 사이에는 혼란이 있었을지언정 유라시아를 무대로 한 교류는 몽골 제국 시대에 이르러 어느 때보다 거대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제국의 지배층이 그런 교류를 적극 후원했다는 점에서 팍스 로마나와 같은 팍스 몽골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거대한 교류를 가능하게 한 기반은 역참(驛站) 제도'''였다. 본래 참(站)의 기원이 된 몽골어 ‘잠’은 초원을 지나다 잠시 쉬어가는 여관을 말하는데, 오고타이 칸 시절부터 이것이 제국의 교통 네트워크로 채택되어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카라코룸은 도읍으로 정하고 서쪽의 주치 올로스, 차가타이 올로스와 연락을 하기 위해 역참 제도를 실시하였다. 또한 몽골 초원과 중국 북부에 ‘나린’ ‘모린’ ‘차도(車道)’의 세 역로를 설치하였다. 이후 제국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역참도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부분을 연결하는 교통망으로 발전하여 올로스가 된 외국인 고려와 같은 나라에도 역참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쿠빌라이 시대에 이르면 카간 올로스 내부에만 1400여 개의 역참이 설치되었고 역참을 관리하는 참호(站戶) 또한 35 ~ 70만 호 저도가 배정되고 있었다. 배정되는 사람은 마필 선박 수레 등의 교통수단과 사신들이 머무는 숙소를 책임졌으며 식량과 사료를 항시 준비했다. 또 역참을 사용하는 자들에게도 규정이 있어 역참 사용자는 신분증인 패자와 포마차찰이라는 문건을 소지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일반 사무와 별개로 군사적인 긴급 사무를 신속하게 수행하기 위해 급체포라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 몽골 제국이 운영한 역참제도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에서 경탄어린 어조로 상세히 묘사된 바 있다. 이런 네트워크는 유라시아 내륙교통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이 격화된 1280년대 말부터 10여 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원만하게 운영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사신의 왕래 이외에 군인 종교인 학자 기술자 등의 교류가 이루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원에서 훌라구 올로스로 파견되어 라시드 앗 딘의 집사 편찬을 도왔던 사람이나 훌라구 올로스에서 대원으로 파견되어 쿠빌라이 칸 휘하에서 중용되었던 자말 앗 딘 이사 등은 그런 올로스 간 다양한 교류의 구체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제정관리를 맡아 자본을 운영하던 오르톡 상인들의 존재 또한 팍스 몽골과 관련되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이들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해 원거리 무역을 수행하였는데 그들의 임무는 자신들에게 자본을 제공한 지배층에게 최대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국에서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여 고액의 이자를 요구하는 알탈전을 운용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다른 한편으로 대륙 차원의 경제교류를 활성화시키고자 은 본위 제도를 시행하고 각 지역 간의 교환단위를 통일하기도 하였다. 은괴 2kg이 통일성을 가지는 하나의 경제단위로 통용되었다. 은 4g 40kg 단위도 마찬가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